우원식 국회의장 제헌절 경축사 모습 |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헌정회장님과 역대 국회의장님,
제헌국회의원 유족회와 국회의원 여러분,
외교사절을 비롯한 내외 귀빈 여러분!
제76주년 제헌절입니다.
경축식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입법부를 대표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뜻깊은 날입니다.
저는 먼저, 제헌헌법에 담긴 초심을 생각해 봅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의 첫 번째 회의가 열렸습니다.
회의는 열렸지만 갖춰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헌국회의원 198명은 매 순간 새로 길을 냈습니다.
첫날, 국회 운영에 필요한 ‘국회 임시준칙’을 토의하고 의장단을 선출한 후
바로 다음 날부터 헌법과 정부조직법, 국회법 제정에 들어갔습니다.
거의 매일 전체회의를 열었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헌법을 의결한 7월 12일까지 43일간
전체회의가 열리지 않은 날은 일요일을 포함해 14일뿐이었습니다.
모두가 배를 곯던 가난한 시절,
제헌의원들의 형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속기록에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많습니다.
지방 출신 의원들의 숙소 문제를 논의하면서
교섭을 맡은 의원이
임대비용을 줄이려면 네 명이 방 하나를 써야 한다고 보고합니다.
이어 국회의장이
돈도 중요하지만 “의원들이 조석을 충분히 못 잡수시고 나오시면
여기서 말할 기운도 많지 않으니까”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다른 회의록에는 한 의원이
“전차 승차권을 발행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다”고 말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출퇴근 교통수단과 숙식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에서도
제헌 의원들이 보여주었던 책임감,
애국심과 헌신 없이는 헌법이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제헌국회의 정신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오늘, 제헌절을 기념하는 국회의 첫 번째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또, 제헌헌법에 담긴 국민의 기대를 되새깁니다.
최초의 민주적 선거, 투표율 95.5%.
국민의 열망을 받아안은 제헌국회가
첫발을 내디딘 날은 온 국민의 축제였습니다.
꽃으로 단장한 전차가 시가행진을 벌였고
국회의사당 인근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인파가 모였습니다.
신문은 그 광경을 “독립을 절규하는 애국 남녀 시민의
환호의 함성이 지축을 흔들었다” 그렇게 전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현행 헌법은 제헌헌법에,
제헌헌법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대한민국 임시헌법’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3.1운동과 임시의정원, 임시정부로 이어진 독립운동의 역사가
제헌헌법에 담겨 오늘의 ‘대한민국헌법’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헌법 제 1조입니다.
1919년부터 지금까지, 105년을 이어 온 내용이지만
그 생명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암흑 같던 독재의 시절에도 헌법 1조는 같았습니다.
사문화되었던 이 조문을 살려낸 것은 국민이었습니다.
국민이 헌법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고
헌법이 다시 국민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안팎으로 여러 도전과 어려움에 직면해있습니다.
국민의 기대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정치,
진영갈등의 회오리 속에서 증발하고 있는 민생과 미래의제,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 속에서 줄어드는 경제와 외교의 공간,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급변하는 과학기술,
때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불안과 혼란이 엄습해올 만큼
국민이 처한 삶의 환경이 좋지 않습니다.
묵은 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시대에 대응할 틀을 만들어
이 위기를 돌파해나가야 합니다.
먼저 개헌입니다.
개헌은 헌법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22대 국회는 개헌을 성사시키는 국회로 나아가겠습니다.
87년 개헌은 국민의 열망과 요구를 바탕으로
국회가 중심이 되어 여야합의로 이루어졌습니다.
내용에서도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을 진일보시켰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눈부신 성취와 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벌써 37년, 이제 곧 40년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서
가히 격변이라 할 만큼,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기후위기와 인구위기,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과제도 등장했습니다.
무엇보다 헌법의 가치와 권리 실현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요구가
과거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커졌습니다.
개헌은 국민의 삶이 향하는 길을 만드는 일입니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개헌의 필요성은 이미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습니다.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개헌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이니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논의도 축적되어 있습니다.
남은 것은 실제로 개헌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2년 동안은 큰 선거가 없습니다.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개헌을 안 하겠다는 작정이 아니라면
본격적인 대선국면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무리하는 것이 맞습니다.
여야 정당에 제안합니다.
‘2026년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하는 것을 목표로
개헌을 추진합시다. 이를 위해 ‘헌법개정특별위원회’부터 구성합시다.
개헌의 폭과 적용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원포인트 개헌, 부분 개헌, 전면 개헌,
또, 즉각 적용, 차기 적용, 총선과 대선이 일치하는 2032년 적용.
다 열어놓고 유연하게, 할 수 있는 만큼, 합의하는 만큼만 합시다.
어떤 경우에라도 다음 지방선거까지는 개헌법안을 통과시키고
대신, 개헌의 폭과 새 헌법을 적용할 시기는 열어두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발목 잡혀서 시간만 끌다가 마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른 시일 안에 ‘국회의장 직속 개헌자문위원회’도 발족시켜
국회 개헌특위가 논의를 본격화할 수 있는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논의과정에서부터 국민적 공감과 합의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께도 공식적으로, ‘개헌 대화’를 제안합니다.
대통령과 입법부 대표가 직접 만나 폭넓게 의견을 교환한다면
개헌의 실현 가능성이 훨씬 커질 것입니다.
진취적이고 생산적인 대화의 시간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헌헌법에 이익분배균점권이라고 하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기업의 이익을 노동자가 나누는 것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이 조항이 만들어진 과정입니다.
이념과 이념, 이해관계와 이해관계가 충돌했고
의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초안 일부를 지우고 자구를 수정해 결론을 냈습니다.
대지주와 농민의 요구가 맞붙은 토지개혁과 농지분배에서도
설득과 중재가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제헌헌법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질서는
이렇듯 치열한 고민과 격렬한 논쟁 끝에
양보와 타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첨예한 갈등,
우리 앞에 놓인 복잡다단한 과제를 해결하는 일도
제헌국회가 보여준 이 모습에서 시작해봅시다.
구조적 저성장,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 취약한 노동과 사회안전망 등
묵힐 대로 묵힌 오래된 과제에 더해,
인구고령화와 축소사회 대응, 탄소 중립, 디지털전환 같은 새로운 과제들까지
물밀듯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의제들 간에 관련성도 높습니다.
무엇보다 국민의 삶은 이 모든 문제와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떼어내기도 어려울뿐더러
개별 현안에 대한 땜질식 대응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계층 간, 세대 간 연대와 포용의 정신에 기초해
경제사회정책 큰 틀에서 일괄타결로 풀어내는
사회적 대타협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당장 올해부터 2차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됩니다.
954만 명, 전체 인구의 18.6%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이 문제 하나에도 정년연장, 임금피크제, 청년 일자리,
연금개혁, 부동산 경기 등 많은 것이 맞물려있습니다.
한국은행은 이들 세대의 은퇴가 진행되는 앞으로 11년간
별도의 정책적 조치가 없다면
연간 경제성장률이 0.38%p 떨어질 것으로 전망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국회를 ‘사회적 대화의 플랫폼’으로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다음 주부터 기업과 노동을 대표하는 기관을 찾아갑니다.
대화가 출발이지만, 대화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습니다.
노사뿐 아니라 세대, 젠더, 지역갈등까지
한꺼번에 놓고 풀 수 있는 해법을 꼭 찾아야 합니다.
국회 차원의 사회적 대타협 기구를 만들어
무엇을 양보하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토론하고
사회 각계가 다 이해당사자가 되는 대타협을 추진하는 데까지
발전시켜보자는 것이 국회의장의 포부입니다.
사명감만이 아닙니다. 국회는 이를 뒷받침할 역량이 있습니다.
국회는 어느 한쪽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국회에는 여러 입법 지원기관이 있습니다.
‘사회적 대타협, 패키지딜’의 기초를 만드는 일에 먼저 나설 수 있습니다.
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정책에 대한
이해와 갈등을 조정, 중재하는 국회의 책무를 다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의원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개헌과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헌법의 주인인 국민의 삶을 지키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본격화된 미?중 전략 경쟁이
우리의 경제 공간까지 축소한 현실에서도 보듯이
안에서의 대응만으로는 국민을 지킬 수 없습니다.
세계질서의 전환기, 의회외교가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와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세계 각국은
자국의 경제안보와 기술혁신 경쟁력을 강화하는
입법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반도체법, 인플레이션 감축법 사례가 보여줬듯이
다른 나라의 국내산업정책이 국경을 넘어
우리 기업과 경제에 영향을 미칩니다.
의회 대 의회, 의원 대 의원,
입법부 간 다양한 수준의 파트너십으로
국익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의회외교가 중요합니다.
의회외교의 유연성은
정부 간 공식 외교채널 가동이 어려울 때
외교채널의 단절을 막고, 대안 외교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지난 2022년 중국 베이징 올림픽 개최 당시
국회의장이 개막식에 참석해 균형외교의 묘미를 살린 일도 있었습니다.
유례없이 복잡해진 외교각축장에 전 세계 의회가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 국회도 외국 의회, 정부, 기관 등을 대상으로 펼치는
의회 외교를 강화하겠습니다.
외교의 중심은 국익과 국민이라는 원칙을 구현하겠습니다.
아시아 여러 신흥국과 전략적 우호협력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기후위기 같은 글로벌 의제에서도 책임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동북아와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터전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포기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구하고
평화의 기반을 만드는 외교에도,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서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꽉 막힌 남북관계에 활로를 마련할 방안이 무엇일지
모색하고 도전하겠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이를 적극 수용해 초청외교를 확대하는 방안도 마련해가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6년 전,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혼란 속에서
나라의 기초를 세운 제헌헌법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제헌부터 이어져 온 헌법정신과 가치는
우리가 가진 자산이고, 도약의 디딤돌입니다.
그러나 오늘 대한민국은
결코 부족하지 않은 그 자산을 제대로 다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정치의 부족함입니다.
제헌절을 맞도록 국회 개원식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질책을 달게 듣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국민을 지키는 국회,
미래로 나아가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 새로워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손잡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한호식 기자 hshan997@newstour.kr